[Why] 내리막 세상에서… 착한 투자를 꿈꾸다

By 2018년 9월 14일insight

임팩트 투자 이해하기

지구 평화를 지키거나 전 세계 빈곤을 퇴치하겠다는 거창한 목표는 아니지만 이왕이면 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다는 욕심이 있다. 자신을 희생할 용기까지는 없지만 좋은 일을 하면서 돈도 버는 게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제현주 대표는 그 목표로 가기 위한 허들의 높이를 낮추고 싶다고 했다./사진=김지호 기자, 그래픽=이철원 기자

카이스트 산업디자인과 나와 기업 M&A 전문가로… 사모펀드 칼라일 상무가 되다
문득 든 생각, 나는 이 일을 왜 하는가 욕망의 조율을 시작했다
대관령에 내려가 집 짓고 철학책 읽으며 글을 썼다

좋은 일을 하면서 돈도 번다. 가능한가. 벤처 캐피털 옐로우독(YellowDog)의 제현주(42) 대표는 그렇다고 말한다. 서울 대학로 샘터 건물의 주인이 바뀌었다는 뉴스와 관련, 제 대표의 이름이 미디어에 종종 등장했다. 역사적 가치가 높은 건물을 사서 적정 수준의 이익을 올리고 공공 가치도 추구한다는 부동산 투자회사 공공그라운드의 대표. 사실 샘터는 그 일부였을 뿐이다.

지난해 말 그는 공공그라운드 대표직을 사임했고, 열흘 남짓 뒤인 2월 1일부터 옐로우독 대표를 맡는다.

우선 구르는 주사위 같았던 제 대표의 이력부터. 경기과학고를 졸업하고 카이스트 산업디자인학과 입학. 카이스트 출신 최초로 글로벌 컨설팅 기업 맥킨지 입사. 이후 홍콩 크레디트스위스 투자은행을 거쳐 29세에 글로벌 사모펀드 칼라일 안착. 기업 M&A(인수·합병) 전문. 상무(Vice President) 승진. 7년 만인 36세에 칼라일 자발적 퇴사. 홍익대 근처에서 철학 책 읽기 모임 시작.

이 모임 회원들과 2012년 전자책 출판을 주로 하는 협동조합 롤링 다이스(Rolling Dice) 창립. 5년간 26권 발행. ‘내리막 세상에서 일하는 노마드를 위한 안내서’ 등 2권을 직접 쓰고 ‘경제학의 배신’ 등 10권 번역.

이번에 그가 새로 내민 옐로우독 명함에는 ‘The Impact Venture Capital’이라고 적혀 있었다. 다음커뮤니케이션 창업자인 이재웅씨가 자본금 200억원을 전액 투자해 2016년 10월에 만든 회사다.

―우선 알 듯 모를 듯한 회사 이름부터. 옐로우독이라니.

“보통 벤처 캐피털은 유니콘을 목표로 한다. 우버나 에어비앤비나 샤오미처럼, 비상장 스타트업에 투자해 상상 속의 뿔 달린 말 유니콘처럼 초대형으로 키우는 것. 물론 그것도 좋겠지만, 우리는 쓸모 있고 친근한 그리고 충실히 제 역할을 하는 ‘누렁이’를 목표로 한다. 그래서 옐로우독. 물론 내가 합류하기 전에 결정된 이름이다(웃음).”

―벤처 캐피털 앞에 붙은 임팩트(Impact)의 의미는.

“임팩트 투자를 하는 금융 자본이라는 뜻이다. 좋은 의미에서 사회에 충격(Impact)을 줄 수 있는 투자라고 할까. 사회적 가치도 만들어내고, 재무적 이익도 동시에 얻는. 일률적으로 말하기 어렵지만, 시장 평균 수익률(연 8~9%)이 목표다.”

―좋은 일을 하면서 돈도 그만큼 번다니. 가능한가.

“우리는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저소득 지역에 임대주택을 지어주거나 아프리카 물 부족 문제를 해결하는 스타트업 기업에 종자돈 대는 것만 임팩트 투자가 아니다. 옐로우독은 차량 공유 서비스를 제공하는 쏘카(Socar)에도 투자했다. 유형에 따라 시장 수익률 이상을 노리기도 한다.”

―자선이나 기부와는 어떻게 다른가.

“대부분의 경우 자선이나 기부는 돈을 주고 나면 끝이다. 투자는 사후 관리를 한다. 목표가 시장 수익률 이상일 때도 있고, 20%까지는 손해를 감수한다가 목표일 때도 있다. 하지만 ‘관리’라는 점에서는 예외 없다.”


대학로 샘터 건물을 인수하던 당시의 제 대표.

―샘터 투자도 그 한 예인가.

“샘터는 사실 옐로우독의 투자가 아니다. 벤처 캐피털에는 두 종류가 있다. 창투사 유형과 신기술 금융사 유형. 옐로우독은 후자다. 그런데 신기술 금융사 유형은 부동산 투자를 할 수 없게 되어 있다. 공공그라운드는 샘터 인수를 위해 별도로 만든 회사다. 내가 옐로우독의 등기 이사를 맡게 되면서 샘터 관련 업무를 더 이상 볼 수 없게 됐다. 공공그라운드 대표를 사임하게 된 이유다.”

―이재웅씨는 당신을 왜 뽑았다고 생각하나.

“일면식도 없는 사이이기는 하지만 사실 SNS상에서는 트위터 맞팔(서로 팔로잉 하는 사이)이고 페이스북 친구 사이였다. 면접 때 내게 묻더라. ‘옐로우독이 어떤 투자를 했으면 좋겠냐’고. 나는 그때 ‘어떤 구체적인 개별 투자를 말한 게 아니라 구조를 만들고 싶다’고 했다. 사회적 가치 창출과 재무적 이익 실현이 동시에 가능한 구조.”

―그의 대답은?

“‘그게 될까?’라고 반문하며 웃으시더라고.”

대표직 수행은 2월 1일부터지만, ‘누렁이’ 팀에 합류한 것은 2017년 6월부터. 옐로우독의 현 투자액은 약 200억원 규모라고 했다. 초기 자본금 200억원과는 별도다. 쏘카를 비롯, 유치원이나 어린이 학원의 셔틀버스 공유 서비스인 셔틀타요, 주거 공간 임대차 서비스를 제공하는 스테이즈 등에 투자했다. 또 아직 확정되지는 않았지만, 경제적 약자나 장애가 있는 아동·청소년에게 교육 서비스를 제공하는 스타트업과도 협의 중이다.

―다른 기업들도 재무 이익만 노린다고 말하지는 않을 텐데.

“물론이다. 윤리적 기준이 낮은 기업도 일부 있겠지만, 모든 기업은 사탕발림일지라도 사회적 가치를 추구한다고 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부수적 의미의 가치 창출이 아니라 처음부터 이 두 개의 가치를 나란히 명시하고 추구하는 기업에 투자하겠다는 것이다.”

‘임팩트 투자’라는 조어(造語)의 기원은 200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우리가 기억하듯 미국이 망할 뻔한 해다. 부동산 가격 대폭락을 불러온 소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이듬해 투자은행 리먼 브러더스는 실제로 파산했다. 자선 단체로 이름난 록펠러재단은 2007년 ‘임팩트 투자’를 창안했고, 지난 10년간 이 용어는 고유명사에서 보통명사로 바뀌어 가는 중이다. 제 대표는 몇 가지 통계와 숫자를 보여줬다. 세계 최대의 자산 운용사인 블랙록이 2014년 공식적으로 임팩트 투자 사업부를 창설했고, 글로벌 사모펀드 TPG는 지난해 20억달러(약 2조3000억원)의 임팩트 투자 펀드를 결성했다. 베인 캐피털 역시 3억9000만달러(약 4400억원) 규모의 임팩트 펀드를 조성했고, 골드만삭스도 임팩트 투자 전문 회사를 인수했다. GIIN (Global Impact Investing Network)은 지난해 ‘임팩트 투자’의 이름으로 운용하는 자산이 1140억달러(약 121조원)에 이른다고 최근 밝혔다. 경이적인 기록을 세웠다는 작년 삼성전자 영업이익 총액이 54조원이었다.

―왜 임팩트 투자가 대세가 됐나.

“여러 시나리오가 있다. 우선 10년 전 리먼 사태와 궤를 같이한다. 이대로 가다가는 투자 업계 모두 망한다는 공감대가 있었다. 지속 가능성을 생각하지 않으면 좋은 수익률을 유지할 수 없다는 깨달음이다.”

―무례한 질문이지만 ‘자본의 가면 쓰기’아니냐고 비판한다면.

“(웃으며) 그럴 때는 이렇게 대답한다. 가면을 쓰면 좀 안 되나. 재무적 이익만 추구했을 돈이 그 반대의 결과를 가져온다면 좋은 것 아니냐. 결과적으로 긍정적 임팩트가 나오지 않나.”

―옐로우독의 자본금은 200억원. TPG는 무려 20억달러 펀드다. 엘리트나 부자만 할 수 있는 투자 아닌가.

“돈이 차고 넘치는 초부유층의 자선이나 기부라 생각할지 모른다. 오해다. 한 달에 10만원씩 적금 붓듯 임팩트 펀드에 한 달 10만원씩 투자할 수도 있다. 친환경을 내세운 화장품을 사게 되듯 평범한 사람들도 이왕이면 좋은 일 하는 펀드에 투자하고 싶어할 거라 생각한다.”

2000년대 초반에 성인이 된 세대를 소위 밀레니얼(Millenial) 세대라고 한다. 1976년생인 제 대표 역시 그중 한 명. 이 세대의 특징 중 하나는 단순히 돈만을 위해 일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일이 사회적으로 의미 있기를 바라는 데 있다고 했다. 투자도 마찬가지. 내가 애써 번 돈이 불어나는 것도 중요하지만, 불어나는 방식 또한 중요하다는 것. 복잡한 숫자와 용어를 뒤로하고, 인간 제현주로 화제를 돌렸다. 어떤 숫자가 나올지 모르는 주사위 같던 인생 궤적. 산업디자인학과를 졸업하고, 컨설팅 회사에 들어가다니.


IMF 외환위기 20주년을 맞아 이헌재(가운데) 전 부총리, 제 대표(오른쪽), 박지웅 패스트트랙 아시아 대표 3인이 ‘과거에서 내일을 배우다’를 주제로 지난해 11월 토크콘서트를 가졌다. /퍼블리 제공

―20대 제현주 시절의 야망은.

“솔직히 나는 사업을 하거나 모험적 일은 할 수 없는 사람이라 생각했다. 겁이 많았으니까. 지금 생각하면 그것도 오해였지만(웃음). 그냥 제일 좋은 직장이랄까. 돈 많이 벌고 사회에서 인정받고, 뭐 그런 직장을 가고 싶었던 듯하다.”

-산업디자인학과를 나와 맥킨지라니.

“카이스트 최초였고, 전국 산업디자인학과에서도 처음이라고 들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내가 ‘곰손’이다(웃음). 하지만 오해하면 안 되는데, 단순히 그림 잘 그리고 모형 잘 만든다고 디자인 잘하는 게 아니다. 디자인의 궁극적 기능은 문제 해결에 있다. 문제를 포착한 뒤 어떤 콘셉트의 제품으로 그 문제점을 해결할 것인가. 절반은 논리적 추론이고 나머지 절반은 제품의 완성이다. 곰손이었던 나는 앞의 절반만 잘했다. 그래서 처음부터 마케팅이나 컨설팅 분야로 진출하겠다고 생각했다. 운이 좋았다. 당시는 컨설팅 업계가 호황이고 전성시대라 최고위 경영 과정에서나 볼 수 있는 경험을 많이 했다. 맥킨지에서 3년6개월 있었고, 홍콩 크레디트스위스은행에서 6개월, 그리고 칼라일에서 7년 있었다.”

―사모펀드 칼라일을 나올 때의 직함은

“바이스 프레지던트. 한국식으로는 상무였다.”

제 대표는 구체적 숫자를 밝히기 어렵다고 했지만, 성과 보수를 합치면 이들이 받는 연봉은 억대 연봉을 몇 배 상회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글로벌 사모펀드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갑(甲) 중의 갑’이라고 불린다. 그 좋은 직장을 왜 버리고 나왔냐고 묻는다면.

“이 대목은 설명하기가 굉장히 어려운데, 일 자체는 매우 즐거웠다. 기업의 현재 가치를 판단하고, M&A 거래 조건을 따지고, 관련 산업의 미래를 예측하는 일. 지적으로도 맞았고, 칼라일에 계신 분들도 좋아했다. 하지만 더 이상 일에서 흥분을 느끼기 어려웠다. 지금에 와서야 깨달았는데, 나는 무엇을 하는가보다 왜 하는가가 더 중요한 사람이었던 듯하다.”

다시 밀레니얼 세대의 삶에 대한 태도로 돌아간다. 그는 제 발로 칼라일을 나왔고, ‘욕망의 조율’을 시작했다. 일부 알려져 있지만 서울의 집을 팔고 강원도 대관령에 내려가 집을 지었고, 철학 책을 읽고 번역하며 글을 썼다. 제 대표의 책 ‘내리막 세상에서 일하는 노마드를 위한 안내서’는 아버지 세대가 아니라 자식 세대의 일에 대한 시선과 태도다. 삶에 단 하나의 이정표만 있던 시대는 끝났다. 오르막은 모두 정상을 목표로 하지만, 내리막은 방사선으로 퍼져 나가는 길.

-칼라일 퇴사 이후 6년이 지났다. 그 6년이 당신에게 뭘 줬냐 묻는다면.

“겁이 없어졌다(웃음). 시스템 도움 없이 맨땅에서 일하는 법을 배웠다. 맥킨지나 칼라일은 글로벌 기업이다. 시스템의 지원으로 편하게 일했다. 하지만 협동조합 롤링 다이스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하나같이 흙바닥에서 시작해 뼈대를 세워야 했다. 스케일은 작았지만 이렇게 일을 하니 무서운 게 없어지더라. 대관령도 마찬가지. 목표가 낮으면 자유가 크다. 지금은 서울과 대관령을 왕복하는 삶이지만, 강원도에 있으면 욕심의 기준이 낮아진다.”

사회적 가치까지 고민하며 투자하는 ‘여자 리처드 기어'(영화 ‘프리티우먼’). 현대인에게 돈을 버는 것은 물론 중요한 목적이지만, 그것 하나만으로 최소한 하루 여덟 시간을 들이는 일의 목적을 설명하기는 어렵다. 주지하다시피 인간은 복잡한 존재. 돈 욕심만 있는 것도, 관계에 대한 욕망만 있는 것도, 사회 공헌 욕구만 있는 것도 아니다. 기준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좀 더 나은 세상을 위해 시간과 돈을 쓰고 싶다는 욕망은 누구에게나 마찬가지. 하지만 그럴 기회가 적거나 생각보다 많은 희생을 해야 한다면 모른 척하고 살기 쉽다. 제 대표는 그 허들을 낮추고 싶다고 했다.

무엇을 먹는가, 무엇을 소비하는가 뿐만 아니라 이제 어디에 투자하는가 역시 당신을 규정하는 시대. 유니콘보다 누렁이에게 애정을 갖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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